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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훈의 이야기力] 음모론에 관한 고찰 (下)

  • Editor. 여지훈 기자
  • 입력 2022.06.1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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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복합성을 과소평가한 눈먼 맹신

다시 선스타인 교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선스타인 교수는 음모론자는 제한된 정보만을 갖고 있거나 몇몇 정보만을 선별해 수용하는 극단주의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극단주의는 사람들이 항의를 표출할 일상적인 배출구가 제한될 때 두드러지며, 시민권과 자유가 제한되고, 접할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거나, 정부에서 일관되게 편향된 정보만을 제공할 때 폭력적인 형태로 증폭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음모론이 확산될 가능성도 훨씬 커지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정부라는 정보 획득 경로 외에 다른 대안 경로가 여럿 있을 경우다. 우리나라와 같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용한 사회의 경우, 정부의 통제가 아무리 커지더라도 정보는 다양한 경로로부터 접할 수 있다.

시민권과 자유가 제한되고, 접할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거나, 정부에서 일관되게 편향된 정보만을 제공할 때 극단주의는 폭력적인 형태로 증폭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음모론이 확산될 가능성도 훨씬 커지게 된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시민권과 자유가 제한되고, 접할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거나, 정부에서 일관되게 편향된 정보만을 제공할 때 극단주의는 폭력적인 형태로 증폭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음모론이 확산될 가능성도 훨씬 커지게 된다. [사진출처=픽사베이]

그런데 만약 다양한 경로에서 수집한 정보가 정부가 제시한 정보와 상충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사람들은 어느 한쪽을 불신할 수밖에 없으며, 보다 권위적으로 여겨지는 쪽, 즉 정부의 정보를 불신하려는 경향이 더 커질 수 있다. 특히 평소 정부의 정보 공개가 투명하지 못하다고 느꼈다면 이러한 경향은 배가된다. 그에 따라 정보를 얻는 또 다른 대안 경로는 흡사 정부라는 악의적인 집단에 맞서는 투사들의 커뮤니티처럼 여겨질 수 있다.

물론 특정 집단의 고의적인 계획에 따라 일어난 사건들도 세상에는 다수 존재한다. 다만 음모론자들이 쉽게 저지르는 잘못 중 하나는 그 일을 벌인 배후자를 지목하는 행위 자체라기보다는 올바르지 못한 배후자를 성급히 지명하거나, 제대로 지명했다 하더라도 상대에 대해 큰 오해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음모론자가 합리적이지 못한 이유는 어떤 다른 정보를 제공하더라도 이들이 그 정보를 불신한다는 데 있다. 자신의 기존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일괄적으로 무시하는 이런 광범위한 확증편향은, 흡사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한 점의 의문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신자의 맹신과 닮은 면모가 있다. 심지어 이들은 음모론이 사실이 아니라면 왜 사람들이 구태여 그것을 힘들게 부정하려 들겠느냐는 생각을 바탕으로, 음모론에 대한 합리적인 부정마저 오히려 음모론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사건이 그런 사건을 초래할 의사가 전혀 없는 수많은 사람의 행동이나 태만의 결과로 생겨난다. 어떤 사건이 반드시 그로 인해 혜택을 입을 누군가의 고의적인 계획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라는 음모론자들의 믿음은 사회현상의 복합성과 창발성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것이다.

복잡다단한 세상사야 말할 것도 없지만, 여기서 언급한 창발성이란 하위 체계에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상위 체계에서 돌연히 출현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잠시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자.

자동차를 구성하는 부품은 수만 개가 있지만, 이들 부품 하나하나에는 ‘운송수단’이라는 자동차의 특성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그러나 각 부품이 모여 상호작용을 하게 되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무언가를 싣고 이동하는 운송수단이라는 특징이 생겨난다. 단순 유기화합물로부터 모종의 작용을 통해 ‘정신’이라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과 심리적 기제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인간 개인 혹은 군집이 특정 자극에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이해가 비약적으로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언어·정치·경제·문화·종교·풍토·인구통계학적 여건이 제각기 다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특정 사건에 어떻게 반응할지 일일이 예상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각 공동체가 내부적으로뿐 아니라 외부적으로 다른 공동체와 끊임없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측면까지 고려한다면, 어떤 변수들이 장차 어떻게 맞물려 상위 체계에선 또 어떤 상황을 촉발할지 예측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한 지역에서의 사건이 지구 반대편에 곧바로 영향력을 끼치는 일이 빈번한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다.

■ 서툴거나, 혹은 거짓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마주했을 때 독실한 신앙인이 “이 모든 것은 신의 섭리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과학적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수용하기 위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해석이다. 그만큼 편하고 쉬운 해석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태도로는 ‘믿음’은 깊어질지언정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는 도달할 수 없다. 세상이 지금껏 발전해올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수긍하는 신앙인들 때문이 아니라, 미지의 것에 호기심을 갖고, 탐구하고, 끊임없는 의문과 논박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해온 과학자들 덕분이다. 각자의 역할이 있겠으나, 적어도 문명의 발전에 있어서만큼은 이를 부정할 수 없다.

음모론 역시 마찬가지다. 검증하거나 반증할 수 없는 이야기는 세상을 해석하는 수많은 흥미로운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며, 과학적 설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설화나 신화에 가깝다.

엄청난 권력을 가진 조직이 있다 한들, 그것이 그 조직이 세상의 모든 걸 기획하고 좌지우지할 힘을 지녔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엄청난 권력을 가진 조직이 있다 한들, 그것이 그 조직이 세상의 모든 걸 기획하고 좌지우지할 힘을 지녔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다. [사진출처=픽사베이]

그러나 이쯤에서 서두에 언급한 촘스키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조직 중 다른 조직에 비해 월등한 힘을 지닌 조직은 늘 있기 마련이며, 개중에도 최상위에 존재하는 조직, 혹은 소수의 그룹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은 타 조직은 비교할 수조차 없는 막대한 자본과 권력,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각 지역 언론을 입맛대로 부리고, 각국 정치인과 기업인, 학자, 유명인사 등을 동원하는 데도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대중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군사 및 첩보 작전을 비밀리에 수행하고 있을 수도 있다. 수많은 위계와 대인 관계, 또 제삼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그 모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처음 의도한 목표를 기필코 달성하는 철두철미하고 짜임새 있게 움직이는 기계 같은 조직 말이다.

그러한 조직의 일면을 글로나마 접하고 싶은 독자라면, 다소 오래전 사건들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오늘날까지 그 능력이 탁월하기로 인정받고 있는 이스라엘의 첩보조직 모사드의 일화를 다룬 책 ‘모사드’(미카엘 바르조하르, 니심 미샬 저)를 읽어보시라. 평범함으로 가득 찬 세상 이면에서 과연 어떤 일들이 계획되고 진행되고 있는지, 또 그 일의 완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 단면을 접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설령 그런 대단한 조직이 있다 한들, 그것이 그 조직이 세상의 모든 걸 기획하고 좌지우지할 힘을 지녔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다.

그런 조직이 있더라도 그것은 여러 힘이 센 조직 중 하나일 뿐이며, 세상의 운영이 아닌 단지 자기 조직의 이익이나 신념을 위해 움직이는 것일 뿐이다. 이들 조직이 특정 목표를 위해 어떤 사건을 기획할 수는 있어도, 사람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게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그 방법이 갈수록 정교하고 교묘해지더라도 인간 군집을 완벽히 통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며, 따라서 그런 비효율을 감당하느니 애초에 관심을 두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끝으로 음모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전쟁과 기아, 전염병 등 끔찍한 사건을 마주했을 때 종종 “신이 계시다면 대체 우리에게 왜 이런 끔찍한 시련을 겪게 하시는가?!”라는 성토가 터져 나오듯 “세상을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들이 있다면 왜 당장 이 세상을 지옥 또는 천국으로 만들지 못하는가? 왜 세상은 둥그런 구처럼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하고, 수만 개의 각을 지닌 모난 도형처럼 끊임없는 마찰과 갈등으로 범벅돼 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다. 첫째, 그들이 무능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매우 서툰 관리자이거나, 둘째, 모든 것을 기획하고 운영한다는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

경제산업팀장

 

글쓴이는 – 한때 음모론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다. 하루에도 전 재산을 잃을 위험이 있는 파생상품을 매매하던 기간 특히 그랬는데, 공교롭게도 포지션만 구축했다 하면 그 포지션과는 반대 방향으로 시장이 움직이도록 하는 대형 사건이 자주 터져 나와 ‘이거, 정말 내 돈을 먹으려고 누군가 다 계획한 거 아냐?’라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설령 개인의 거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여론을 조장해 투자자 다수가 비슷한 포지션을 구축하게끔 유도하는 일종의 음모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취재 후기 – 신앙과 마찬가지로 음모론 역시 믿음의 문제임을 깨닫는 좋은 계기가 됐다. 기자의 주위에는 독실한 신앙이 있음에도 음모론에 심취한 이가 있는데, 실제로 음모론의 배후세력으로 종종 입에 오르내리는 가문의 자금을 운용하는 이들과 연이 닿아 있는 이였다. 음모론과 관련된 그이의 주장인즉슨 ‘모종의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려 온갖 음모를 꾸미지만, 그것 역시 더 큰 신의 섭리 아래 계획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자가 보기엔 영 아니올시다였다. 사람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한 주체가 운용하기엔 너무나 큰 자금을 보유한 이들은 결코 그것을 독자적으로 운용하지 않는다. 이들의 자금은 전 세계에 퍼진 여러 운용사에 분배되고, 이들 운용사는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하나의 목적이 아니라, 각기 다른 투자대상과 투자전략, 투자기법을 보유한 채 수탁한 자금을 개별적으로 운용한다. 심지어 각 운용사 간에는 서로 상충하는 전략이 사용되기도 한다. 단순히 이들 가문의 자금 운용을 맡았다고 해서 뭔가 대단한 음모에 동참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건 지나친 해석이란 말이다.

믿음과 관련해서, 기자가 가진 믿음 중 하나는 ‘세상은 알지 못하는 것투성이며, 따라서 어떤 것도 성급히 단정 짓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 믿음 아래, 도무지 확인할 길 없는 음모론과 그에 대한 부정 모두 현시점에서는 판단을 보류하는 게 최선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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